[고장원의 사이언스 or 픽션]석가모니를 복제하면 21세기 성자가 될까 ................ 주간경향
- 석가모니가 21세기에 찾아와 물질문명이 얼마나 발달하건 간에 바뀌지 않는 인간의 근본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면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현세의 온갖 물욕이 눈 녹듯 사라질까?
음력 4월 8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석가모니는 중생에게 자비(慈悲)를 베푸는 동시에 몸소 해탈(解脫)에 이르는 모범을 보인 후 기원전 483년께 열반(涅槃)에 드셨다.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나 엉뚱하고도 흥미로운 가정을 하나 해보자. 성서에서는 세상이 종말에 이르면 예수가 재림하여 하느님을 충실히 믿어온 예쁜이들은 구원하고 나머지 밉상들은 죄다 지옥으로 내치는 최후의 종교재판을 하겠다 한다. 그런데 만일 예수 대신 부처가 다시 재림(再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석가모니의 기본사상을 고려할 때, 적어도 추상 같은 가톨릭 종교 재판소처럼 이분법적 잣대로 사람을 구분하지는 않을 듯하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자 미리 말해두자면 필자는 불교신자가 전혀 아니다. 다만 종교 교리의 특성상 그런 인상을 받을 따름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산업사회에서 각박하게 살아온 현대인들이 다시 현신(現身)한 부처의 말씀을 깊이 새겨 남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가운데 생로병사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250번의 윤회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섣불리 답하기 전에 일단 질문을 꺼낸 이상 나름 진지하게 접근해보자. 무엇보다 먼저 부처를 어떻게 재림하게 할지부터 그 구체적인 방안을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예수는 요한이라는 제자의 입을 빌려 일찌감치 재림하겠다는 예고편을 띄웠지만, 부처는 열반에 들며 오히려 살아생전의 미련을 깨끗이 비웠으니 재림을 약속하지도 그럴 의사도 없지 않겠는가. 다행히 불교에서는 윤회사상을 믿으니 후세에 또 다른 석가모니가 속세에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미륵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분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까마득한 후세에 도래할 불교계의 메시아지만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지 무려 56억7000만년 후에나 이승에 태어나신다니 논외로 치자. 그때쯤 오셔봤자 태양의 수명이 다한지라 구원할 만한 인간이 단 한 명도 태양계에 남아있지 않으리라. (지구는 부풀어 오른 태양에 먹힌 지 오래되었을 테고.)

예수 대신 부처가 재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니 우리에게 의미 있는, 가까운 미래에 부처님을 뵙고 싶다면 미륵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문제는 석가모니의 재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사실. 불교사상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전생(轉生)의 업보를 안고 산다. 벌레든 사람이든 그 업보가 사라질 때까지 윤회해야 하는데,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윤회에서 영원히 벗어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부처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재림이다. 불교 기반의 우주 작동 시스템이 원래 그리 되어 있으니까. 석가모니는 신(우주의 창조주) 혹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 그저 인류의 모범이 되는 선각자에 불과하니 우주의 법칙을 임의로 바꿀 수야 없지 않은가.
남은 길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닌 또 다른 인간이 반복되는 윤회를 거쳐 제2의 석가모니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문제는 바로 스케줄. 우리가 간절히 원할 때, 다시 말해 시대와 사회가 믿고 의지할 영적 지도자를 절실히 바랄 때 세상에 오셔야 할 텐데, 과연 그 때가 언제란 말인가? 기존의 석가모니는 모두 약 250번의 윤회를 거쳤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대신 징그러운 벌레로 축생(畜生)한 적도 있다. 석가모니는 처음부터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차츰 인고(忍苦)의 노력을 거쳐 완벽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예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더구나 마흔이 되면 누구나 공자처럼 불혹의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250번 윤회한다고 죄다 석가모니처럼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그 갑절의 갑절만큼 윤회해도 깨달은 바가 오십보백보일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영원히 축생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짓만 골라 하며 생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부처가 행한 기적을 담고 있는 스리랑카의 우표 시리즈.
요행히 기존의 석가모니만큼 윤회하여 득도(得道)하는 새로운 석가모니가 태어날 여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앞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250번의 윤회가 힌트다. 석가모니가 살던 시절 평균수명은 40~50세 사이였다. (석가모니가 80세까지 산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당시 한 세대의 평균수명을 어림잡아 45세로 잡으면, 250세대는 약 1만1250년이 된다. 그 뒤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났으니 실제로는 이보다 더 긴 세월을 요할 수도 있다. 반면 2016년 현재는 석가모니가 돌아가신지 고작 2500여년 지났을 뿐이다. 인류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석가모니에 견줄 인재가 자주 태어나기는 실로 어려운 듯하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므로 이 범주에서 제외한다.) 이런 셈법으로는 또 다른 석가모니가 태어나기까지 약 8700년 내외를 기다려야 한다. 물론 이 계산은 모수(母數)가 기존의 석가모니 사례 1건밖에 없으니 통계학적 대표성이 떨어져 단지 참고자료로만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석가모니가 태어나길 무작정 고대하는 사이 인류 자체가 이미 다른 종으로 진화해버릴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한 번 태어난 석가모니는 윤회할 수 없고 새로운 석가모니 또한 언제 태어날지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라면 우리 손으로 이 문제를 제어할 방법이 없을까? SF적인 감수성으로 일단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관련 과학기술이 발달을 거듭하다 보면 조만간 혹은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은 DNA 복원을 통해 멸종한 공룡을 복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은 이 시리즈의 최신판 <쥬라기 월드>(2015) 영화의 한 장면.
첫째는 DNA 복원을 통한 오리지널의 복제다. 전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한 할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을 기억하는 이라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DNA를 추출하자면 세포샘플이 있어야 하는데, 부처의 경우에는 사리(舍利)를 남겨 놓았다. 사리는 고인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 가운데 구슬처럼 생긴 것을 일컫는다. 안타깝게도 화장(火葬)할 때에는 900~1200도의 고온이 1시간가량 지속되므로 생체 DNA 구조가 파괴되거나 심하게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따라서 현재까지 진신사리로 믿어지는 것들 가운데 DNA 보존상태가 완벽한 샘플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부처의 머리칼 몇 올 또한 일부 사찰에 전해지는데, 젊어서 처음 삭발할 때의 것이라는 설명에는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싯다르타가 머리를 밀 당시 종교계의 관행을 알기 어렵지만, 후일 석가모니로 추앙받기 한참 전인 청년시절부터 관계자들이 그의 자른 머리카락을 일찍부터 보관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둘째로, 사리를 통해 DNA를 구할 수 없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살아있는 석가모니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머리카락을 얻어오는 방법이 있다. 누가 알겠는가, 좋은 뜻에 공감하신 석가모니가 쾌히 머리털 몇 가닥 내어주실지. 박성환의 단편소설 <관광지에서>(2009년)를 읽어보면 주인공이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를 모시고 생전의 부처님을 뵈러 고대 인도로 시간여행을 한다.
사리건 머리카락이건 제대로 정품(!) DNA를 구해 석가모니를 우리 시대에 복제해낸다 해도 아직 문제가 남아있다.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했다. 복제인간이 21세기 아스팔트 도시에서 과학자들 손에 고아로 자라나면 과연 나중에 가서 기원전 5세기의 성자(聖者) 같은 오라를 뿜어내는 현인이 된다는 보장이 100% 있을까? 대리 부모에 위탁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대안이겠으나 어쨌든 오리지널 고타마 싯다르타의 성장환경과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고타마는 오늘날 네팔에 해당하는 고대 인도의 소국에서 왕위를 이을 왕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지배할 ‘왕 중의 왕’이 되어주길 바라는 왕실과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름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인생을 선택했다. (예수가 당면했던 현실도 이와 닮았다. 예수가 유대사회의 메시아로 급부상할 때 열심당원들은 그가 영적 지도자가 되는 대신 오늘날의 이스라엘 같은 군사강국을 만들어주길 열망했다.) 코딱지만한 나라에서 왕이 되어 이웃나라들과 콩 볶듯 싸워봤자 쉽게 이기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승승장구한다 한들 평생 전쟁터를 누벼야 한다. 대신 고타마는 정치군사 영역이 아니라 영적(靈的) 차원의 지도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 전략은 주효하여 부처의 사후 몇백 년간 불교는 인도의 꽤 많은 지역에서 힌두교를 몰아내고 융성했다. (불교 이데올로기가 당시 인도의 여러 나라 왕조들 입장에서는 국론을 통일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왕들 입장에서는 석가모니의 사상은 영적인 차원의 이데올로기이므로 맞서 싸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석가모니의 대리인임을 천명하며 국민 교화에 이용하기 좋은 선전선동 도구였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들이 남아있지만 DNA 보존상태가 완벽한 상태일지는 미지수다. 사진은 경기 부천 석왕사가 스리랑카 수부티 사찰과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으로부터 기증받아 공개한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 / 임아영 기자
석가모니는 명색이 일국의 왕자였고 일류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생로병사처럼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피해나갈 수 없는 운명에 대해 깊이 고뇌한 결과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는’ 경지에 올랐다. 그렇다면 그의 복제인간에게도 이와 거의 유사한 사회화 조건을 제공할 수 있을까? 혹여 성장과정에서의 이런저런 차이가 영향을 주어 복제인간이 사상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거나 최악의 경우 그냥 평범하게 잊혀지는 이가 될지 누가 알랴. 혈통론자들은 타고난 유전자는 속일 수 없다며 좋은 씨앗은 어디에 심어도 튼실한 열매를 맺노라고 주장하지만, 환경결정론자들은 씨앗보다는 토양을 중시한다. 현대판 메시아를 그린 로벗 A. 하인라인(Robert A. Heinlein)의 장편소설 <낯선 땅의 이방인(Stranger in Strange Land)>(1961년)은 후자의 논리를 따른 예다. 우리에 비해 아주 도덕적이고 고결한 문화를 누리는 화성인 사회에서 나고 자란 인간의 아이가 지구에 돌아온다. 몸은 인간이지만 머리 속은 화성인에 가까운 그는 현대 산업사회의 말초적인 문명에 잠시 유혹되기는 하나 결국 자신이 뜻한 대로 길을 간 끝에 구원을 위해 순교한다.
복제인간이 과연 기대대로 성자로 자랄지 걱정된다면 이러한 근심을 일거에 날려버릴 마지막 대안이 있다. 그것은 바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석가모니를 직접 현대로 모셔오는 것이다. 머리카락 갖고 씨름하느니 직접 석가모니가 일정 기간 방문하셔서 미래의 중생 또한 구원해 주십사 하고 애걸복걸하면 감동하여 찾아주실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그럼 만사 끝일까? 석가모니가 21세기에 찾아와 물질문명이 얼마나 발달하건 간에 바뀌지 않는 인간의 근본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면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현세의 온갖 물욕이 눈 녹듯 사라질까? 솔직히 필자는 오래된 DNA의 복제나 타임머신 같은 방법론은 언제고 실현될지 모르나 속세에 찌든 이들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데에는 석가모니라 한들 한계가 있으리라 본다.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석가모니를 적대시할 우려가 높은 세력이 기존의 불교종단이다. 지난 수천년의 동서양 역사가 보여주듯 종교는 권력이며 고도의 정치행위다. 대대로 기득권을 누려온 전 세계 불교계 앞에 석가모니가 현신하여 “원래 내 의도는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는 뜻이었노라…” 하는 식으로 설법한다고 생각해보라. 일반신도들은 감읍하여 눈물을 왈칵 쏟을지 모르나, 종단의 고위지도자들은 ‘듣보잡’이라 할 수밖에 없는 수수께끼의 사내가 시간여행자의 손에 이끌려 와서 자신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콩이야 팥이야 한다면 ‘네, 네!’ 하며 연신 허리를 굽실댈까?
천년이 넘는 지난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교황이 고도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지 신이나 예수로부터 선택받은 자가 아님을 잘 안다. 그렇다면 이리저리 종파가 갈라지고 종파와 종단 간 이해가 충돌하는 불교계라 한들 오십보백보 아니겠는가. 아마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날 다시 재림하여 (성전 내 장사치들의 좌판을 뒤엎은 성서 속 일화에서와 같이) 기존 기독교계의 부조리와 문제들을 정면비판하고 나선다면 아마 대부분의 기성 기독교 교단으로부터 적그리스도 취급을 받으며 파문당할지 모른다. 그만큼 오늘날의 사회는 석가모니나 예수가 살던 사회만큼 단순하지도 상대적으로 순수하지도 않다. 현대의 우리는 더 많이 의심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한다. 과연 이러한 자들을 석가모니나 예수가 말씀의 힘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고장원 SF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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